2012년 2월 26일 일요일

2011년 12월 5일 월요일

<마케팅> 맥도날드의 글로벌 마케팅(아시아 개괄) - (7)


 지금까지 우리는 유럽과 미국 시장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소개해드릴 아시아 국가들은 앞서 보여드린 국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식습관이죠. 유럽과 미국의 경우 원래 주식이 음식이 밀가루를 이용하거나 고기를 이용한(특히 소고기) 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시장은 식습관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아시아인은 전통적으로 쌀을 먹고, 외국보다 고기를 적게 섭취하죠.(물론 요새는 많이 서구화 되었지만) 심지어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소고기를 먹지 않습니다.(82%의 국민이 힌두교를 믿습니다.-위키피디아)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따라서 맥도날드가 자신의 모국(미국)과 전혀 다른 문화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역화 마케팅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서구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트렌드라고 해도 트렌드보다 더 오래 바뀌지 않았던 생활양식, 문화, 전통이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맥도날드가 아시아시장에 쉽게 접근 할 수 없는 이유는 단지 식습관뿐만이 아닙니다. 가족을 중시하는 태도, 슬로우 푸드, 셀프서비스에 대한 태도 등 많은 것들이 맥도날드의 가치와 부딪히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도날드가 아시아를 잡아야 할 이유는 명확합니다. 굳이 뽑자면 아시아 시장이 가진 높은 성장가능성, 많은 인구 등이 그 이유가 되겠죠. 이런 가능성 때문에 맥도날드는 아시아 시장에 진입했고, 꾸준한 지역화를 통해 결국 전체 수익의 19%(2009년 경영 리포트에서 발표된 수치지만 중국맥도날드의 성장으로 지금은 더 클 것 같습니다.)를 차지하는 거대한 시장이 되었습니다.
 
 아시아 시장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곳은 역시 일본과 중국, 아랫동네에 있는 호주 같은 강대국들이지만,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호주를 빼고 일본과 인도, 그리고 중국에서의 맥도날드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011년 12월 4일 일요일

<독후감>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 김사과의 '풀이 눕는다'를 읽고



<김사과의 소설 '풀이 눕는다'의 표지>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나는 소설속의 ‘나’처럼 지하철에서 소설과 현실의 괴리감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고개를 들면 덜컹거리는 지하철소리, 그러나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면 펼쳐지는 [풀이 눕는다]의 세계.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그랬을까. 책을 읽는 동안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소설 속 ‘나’의 파격적인 행동과 언행에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만 조그맣게 들릴 뿐이었다. 왜 그렇게 가슴이 뛰었을까. 소위 인생 막장이라고 불리는 ‘나’의 이야기에서 소소한 대리만족을 느껴서 그랬을까?

 하지만 정말 내가 두근거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함께라는 시간 자체이지 그것에 대한 대비나 계획이 아니다. 그러니까 돈 따위가 우리의 사랑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그게 내 꿈이었다.”(158page)
 
 이 부분을 접한 나는 처음엔 조금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굶어죽을 수도 있는 사랑이 무엇일까? 굶어 죽을 정도로 사랑이 중요한 것 인가? 그럼 ‘굶어죽는다’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런 생각은 주인공 ‘나’의 “왜?”라는 질문에서 뒤통수를 맞았다. “그러면 도대체 내 존재자체에 충실한 그런 삶이 아니라면 왜 살아야 하나요?” 이게 그녀의 답문이었다. 그것은 수면과 같이 잠잠한 나의 생각에 조그만 파장과 같았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녀의 당돌한 반문과 함께 서서히 동조되어 갔다. 물론 그녀가 초반부분을 넘어가서 한 행동들은(예를 들어 풀이 일을 나가고 나서 하루 종일 술 먹고 잠만 잔다던지) 그녀 자신에게 충실하다고 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도대체 술이 아니면 무엇이 그녀를 버티게 할 것인가. 나아가서 도대체 술이 아니면 무엇이 그녀의 의지를 세상에 외칠 수 있게 할 수 있는 것인가.

 후반부에 가면 갈수록 글속의 ‘나’는 더욱더 술에 의지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그녀의 마음에 뚫린 검은 구멍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속 그녀의 맨 처음 그러니까 풀을 만나기 이전까지 그녀의 구멍은 조그만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자신이 사회에 부적합하다는 것,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학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오는 구멍이었다. 그러나 후반부에 나오는 검은 구멍은 아무리 술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풀이 벌려놓은 그녀의 진정성을 형상화한 것이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의 구멍을 풀의 존재로 채우려 했다.>

 그녀는 풀을 만남으로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채워가고 실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풀과 그녀를 동기화하는 방법으로 시작된 그 과정에서 그녀의 많은 부분을 풀의 존재 자체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풀이 없으면 한시도 존재할 수 없을 것처럼 그에게 집착하다가 그녀가 풀과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느꼈을 때, 일순간 그 구멍이 너무나 커져버린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편 이 구멍에 대한 이야기가 나에게 연예라는 코드 외에 철학적인 코드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의 묘사가 이전의 내가 읽었던 소설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었던 대부분의 성장소설(현실과의 괴리감에 고뇌하는)들은 그 구멍을 번데기, 알, 날개가 돋아나기 전 등으로 해석했다. 그 뜻은 미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시간이 지나면, 혹은 어떠한 계기로 인해 그것이 부서져서 얼마든지 이상으로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해주었다.

 물론 가슴에 구멍이 났다는 표현은 연예라는 코드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지만, 비교를 하자면 주인공 ‘나’의 검은 구멍은 희망마저 없어져 버린 완전한 절망을 뜻한다. 번데기는 나비가 되어 날아갈 수 있지만, 구멍은 매워도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오히려 구멍은 매울 수 없고, 더 커지기도 하며, 심지어 매워졌던 구멍에 다시 구멍이 뚫리기도 한다. 이것은 [풀이 눕는다]가 무서운 이유 중에 하나다. 우리는 절대로 삶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두 번째로 무서운 점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나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도 주인공처럼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빠진다고 해도 나를 묶고 있는 사슬을 끊어 버릴 수 있을 만큼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

 물론 그녀의 사고방식은 나와 다르다. 그녀는 돈에 대한 관념이 없고, 풀을 만나기 전까진 옭아매고 있는 것조차 가족으로 한정되어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내가 그녀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물론 사고방식과 환경을 제외하고서라도 그런 결정에는 많은 고민이 따른다. 그녀도 이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러니까 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계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웠던 모든 규칙들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58page)
 
 그녀의 세계라는 말의 의미는 사회적인 모든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계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일상을 탈출하기위해 계획 없이 여행을 간다고 해보자.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 계획 없는 여행조차도 일상에서 휴가를 내거나 일시적으로 하는 일을 중단하는 것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이다. 내가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것이 나만의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집에 가야하고, 머릿속엔 학교 과제나 아르바이트 같은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단지 걷고 싶어서 거리에 나가는 생각을 해도 이정도인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다를까? 오히려 그 사람과 연결된 것도 어쩌면 사슬이며, 그 사람을 만나도 모든 게 약속의 연장이고, 정해지고 계획된 시간에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시계를 삼켰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시계를 삼켜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계를 뱉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결국 죽는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소설 속에 ‘나’도 세계와의 연결을 완전히 끊을 수 없음을 시인하고,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표현한다.
 
나는 분명히 익사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하찮은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13 page)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해? 물론 풀도 내 생각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렇다. 거기에는 꼭 하지만이 따라붙었다. 단순했다. 돈을 벌지 못하면 굶어야 하고 굶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56page)
 
 심지어 소설속의 ‘나’에게 이상과 가장 가깝다고 여겨졌던, 사랑과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풀이 죽으면서 소설은 이야기를 맺는다. 그러나 소설은 이런 말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남은 것은 그 삶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뻔뻔함과 얄팍한 위안뿐이었다. 우리는 이제 서로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 손을 잡아줄 사람은 서로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270page)
 
 자기가 원하는 것과 현실의 대립 속에서도 그녀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라고 말한다. 그것이 주인공인 ‘나’에게는 사랑이었지만, 아마 사랑 외에 다른 것도 가능하리라. 예를 들면 소설속의 김권처럼. 김권은 어떻게 보면 겉치레만 하는 속이 빈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김권의 삶의 방식역시 현대사회에서 점점 의미를 잃어가는 삶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지 않나싶다. 물론 그의 방식은 그림을 그리는 등의 예술적 순수성과는 많이 동떨어져있다. 그러나 순수와 순수하지 않은 것을 떠나서 그 궁극적인 목표는 주인공 ‘나’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많은 김권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심지어는 풀과 친해지자 풀과 사귄다고 생각하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김권을 시험하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도 현실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보이는 풀과의 동질성과 이질적인 사랑과 순수라는 요소의 부재에서 오는 거부반응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는 내가 [풀이 눕는다]에서 느낀 감정과 주인공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다면, 이제 소설전체적인 느낌을 말해보고 싶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두 명의 시인이 떠올랐다. 그들은 바로 시인 황병승과 진은영이다. 공교롭게도 이 둘의 시집을 최근에 접에서 그런지 여러 가지 부분에서 이미지가 겹쳐졌다.

 실제로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에 쓰인 시를 소설에 그대로 옮겼던 황병승 시의 느낌과 소설 [풀이 눕는다]의 공통점을 살펴보겠다. 먼저 둘 다 굉장히 파괴적이고 세상에 반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리고 기존 문학계의 권위에 맞서는 그 당돌함과 비판의식은 황병승이 가진 이미지나 소설에 나온 ‘나’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리고 황병승의 시에 나오는 하위문화가 가지는 ‘그들만의 승리’ 같은 모습 또한 세상과 대립되는 나와 풀의 사랑과 다름이 없다.

 또한 주인공 ‘나’의 모습과 감정은 진은영의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에 나온 것과 유사하다. 몇 가지 구절을 인용하자면 시집에 있는 [나에게]라는 시에서 시인은.....
 
(중략)
실패한 시인
실패한 혁명
불꽃
분홍플라스틱의 고약한 연기 속에서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물속의 불꽃들

                             -나에게, 진은영 [우리는 매일매일]
 
 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시인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또한 혁명도 실패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혁명이란 아마도 시인의 혁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는 불꽃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을 태우는 순수한 불꽃, 그것에서는 분홍플라스틱의 고약한 연기가 난다. 그러나 실패는 실패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그리고 더 잘 실패하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물속의 불꽃이라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나’와 풀도 항상 실패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세상에게 반항한다. 그 도전은 실패할 것이 분명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비난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끝없는 밑바닥으로 향하지만 그녀와 풀의 도전의 의미는 크다. 왜냐하면 그 실패로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같은 사람들은 조금씩 시계를 무시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물론 이것으로 인해 바로 사람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실패하기 때문이다. 아까 말했듯 우리가 인간인 이상 세계와의 연결은 완전히 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시계를 삼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것 자체로 조그만 성공이 아닐까싶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다 읽은 시점에서 풀은 사람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게 풀이 이상적이었던 이유는 풀은 ‘나’의 모습과 다르게 세상에 끊임없이 반항하는 일종의 동경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그 말인 즉 풀은 그 존재자체로 그녀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풀은 스스로 몸을 던지지만, 그것자체가 세상에 대한 반항으로 보인다. 물론 풀의 죽음은 결국 조그만 파장으로 멈춰 실패하겠지만, 그 시도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수영의 시 [풀이 눕는다]에서처럼 풀은 다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